Dale Rossman empties a load of corn into a truck from his combine while harvesting corn on his farm in Spring Mills, Pa., Sunday, Oct. 28, 2007. (AP Photo/Carolyn Kaster)

오늘은 제레미 레프킨이 쓴 글 중에서 미국 서부 개척기와 관련된 소떼의 모습을 살펴보자.

1890년 미 국세조사국이 공식적으로 서부개척 종료를 공포할 무렵, 서부 유럽 전체면적과 맞먹는 목초지가 미 서부에 있었다.  미국의 축산문화는 텍사스에서 잉태되었다. 남부 텍사스는 온화한 기후, 충부한 초지와 물이 있었다.

18세기 말엽, 프란체스코 사제들은 텍사스에 50군데가 넘는 선교단체들을 설립했다. 각 선교단체들은 한무리의 소떼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자 텍사스 선교단체들은 새로운 정부에 충성을 서약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1830년대 멕시코가 독립전쟁을 치르는 동안 스페인 목축업자들이 자신들의 소를 야생에 남겨 두었다. 텍사스공화국이 1836년 성립되자 텍사스는 야생의 소들은 자신들의 소유라고 선포하고 텍사스인들에게 개척할 권리를 부여했다. 당시 10만마리의 소들이 텍사스를 떠돌아 다녔는데 30년 정도 지난, 1860년 남북전쟁 직전에는 그 수가 350만마리로 폭증했다. 하지만 남북전쟁으로 인해 남부의 목축업은 황폐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에서 수입된 롱혼의 소들은 미 서부지역에 적응하기가 유리했다. 이 롱혼은 15마일에서 다가오는 소나기, 64킬로미터 거리에 숨겨진 개울이나 물웅덩이까지 감자할 수 있었으며 여기에다 탁월한 기동성까지 갖추고 있었다

1864년 젊은 사업가 조지프 멕코이는 텍사스의 소떼를 동쪽철도와 연계시키는 구상으로 돈을 벌었다. 그 역사적인 만남의 장소는 캔사스주의 애빌린이었다. 1871년 애빌린에서 수송되는 롱혼은 연간 7만마리에 육박했다. 전쟁 전에는 면화가 최대 수출품이었다. 그 면화가 쇠고기 시장과 경합을 벌였다. 남북 축산단지는 1870년대 발전을 거듭했다. 결국 텍사스의 소들만으로는 엄청난 수요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자, 목축업자들은 소 사육을 위한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나섰다.

미서부 목장지대는 미국 전체 영토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위로는 텍사스에서 오클라호마, 캔자스,콜로라도, 애리조나, 뉴멕시코까지 북으로는 다코다, 몬태나, 와이오밍까지 서로는 아이다호, 캘리포니아, 오리건까지 뻗어있다. 서부의 야생풀들은 동부지역의 풀보다 가뭄에 잘 견딜 뿐 아니라 겨울내내 헛간에 저장할 필요도 없다.

1876년 포트키오 근처의 초지에서 소들이 무난히 겨울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주둔군 사령관 넬슨 마일스 장군은 전설같은 예언을 남겼다. ‘우리가 버팔로와 인디언을 없애버리면 이곳은 소들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버팔로 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몇 년이 지나자 버팔로는 수천년간 삶의 터전이었던 서부지역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버팔로 떼의 먹이였던 키작은 풀은 이제 60만 마리 소들의 몫이 되었다. 1871년 겨울만 하더라도 캔자스 군 주둔지 근처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버팔로가 돌아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1873년 도지 대령의 기록에는 수많은 버팔로들의 사체가 널부러져 있고 악취나는 불모지로 변해 있었다고 기록한다. 도지대령은 학살된 버팔로가 400만 마리 이상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버팔로 사냥군들은 가죽 1장당 대개 1~3달러를 받았다. 당시 버팔로 사냥은 인기있는 스포츠 행사 중 하나였다. 기차를타고 가면서 편안하고 안전하게 방아쇠를 마음껏 당길 수 있었던 것이다. 1870년대 버팔로 사냥은 부유한 동부인들과 유럽 귀족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역사학자 에릭 로스는 ‘대평원에서의 버팔로 사냥은 육우사육을 위한 필수 전제 조건이었다’고 말한다. 평원에 거주하는 인디언들의 저항을 무력화시키기위해서는 버팔로의 학살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1870년 미국의 전쟁부서는 인디언들의 양식인 평원의 버팔로를 제거함으로써 인디언 정책을 학살에서 굴복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러한 인디언 기아정책은 1880년대 초까지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버팔로가 모두 사라지자 인디언들은 생존을 위해 전적으로 정부의 식량배급에 매달려야 했다. 이후 미정부는 쇠고기 공급처와 유통을 관리하면서 수만명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거의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었다.

버팔로가 있던 자리에 소를 키우게 된 목축업자들은 굶주린 인디언들을 먹여 살리는 정부에 쇠고기를 판매한 것이다. 수많은 목축업자들이 초창기에 이런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것이다. 워싱턴의 ‘쇠고기 동맹’은 남북전쟁 이후 공공사업을 따내기위해 펼쳐진 로비들 중에서도 특히 악명 높았다. 목축을 하던 초창기 수십년동안 미 정부는 공유지 사용과 점유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정부의 비공식적인 묵인은 광범위한 부패의 길을 열어 주었다. 이 결과 광대한 서부 방목지는 목축업자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1885년 클리블렌드 대통령이 직접개입하여 인디언 지정 거류지에서 모든 소들을 퇴거시키라는 명령을 할 정도였다.

1880년 영국시장에서는 저렴한 미국산 쇠고기가 값비싼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산 쇠고기 시장을 야금야금 잠식했다. 이 기회를 틈타 영국 귀족, 법률가, 재정가, 사업가들이 서부 목초지에 자금줄을 대기 시작했다. 1879년 5월, 7만 파운드 자본금으로 설립된 앵글로 아메리카 캐틀 주식회사가 가장 먼저 발을 들여 놓았다. 1880년에는 프레이어 캐틀 주식회사가, 1882년 마타도르 랜드 앤드 캐틀 컴퍼니가, 1883년에 웨스턴 렌처스 주식회사가 각각 설립되었다.

1870년대에 이미 미국 목장주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목축업자 조합을 속속 설립했다. 하지만 그들은 외국의 축산 대실업가를 위한 대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1880년대 중반에는 영국의 재정적 이해관계가 조합들을 지배하면서 대부분 서부지역은 영국제국의 반식민지적 전초지로 전락해 버렸다.

옥수수는 오늘날 소들을 사육하는 대표적 사료가 되었다. 중서부 미국 농민들은 이미 1830년대 초에 잉여 옥수수를 소들에게 먹이는 실험을 시작했다.  남북전쟁 직전, 소들은 세인트루이스와 시카고 도살장에 보내지기 전에 아이오와 평원과 일리노이즈에서 옥수수를 먹으며 체중을 더 불렸다. 1870년 중서부에는 옥수수가 남아 돌았다. 이는 옥수수를 과잉생산하는 주들과 목축업자들의 공조관계로 발전했다. 새로운 공조관계는 영국인을 끌여들였다. 영국인들은 해더로 키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쇠고기에서 목초와 옥수수로 키운 미국산 쇠고기로 재빨리 입맛을 바꾸었다.  1880년 영국으로 수입되는 쇠고기 90%가 미국산 쇠고기였다.

1950년에서 1990년 사이 미국 소는 8,000만 마리에서 1억마리로 증가했는데 대부분 목초를 실컷 먹고나서 옥수수로 다시 체중을 불렸다. 문제는 열량이 높은 음식이 소의 생리에는 부적합하다는 점이다. 가장 흔한 질환으로는 ‘혹위 간장 농양 합병증’이다. 미국에서 도살되는 소 중 약 8%에 달하는 소의 간에서 농양이 발견된다. 오늘날 1억 6000만 에이커에 달하는 미국 농경지에서는 2억 2천만 톤의 곡식이 소를 비롯한 다른 가축들을 위해 재배되고 있다. 주로 소가 소비하는 곡물은 전 국민이 소비하는 곡식의 두배에 달하고 있다.

만약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가축사료가 아닌 인간이 직접 소비한다면 지구상 10억의 사람들이 곡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Stone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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