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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론’은 부산외국어대학교 외교학과 교수들이 공동으로 출판한 책이다.

성병욱 강사가 ‘외교의 의미’에 대해
권선홍 교수가 ‘유교문명권의 외교’
고홍근 교수가 ‘힌두문명권의 외교’
황영주 교수가 ‘중세 유럽에서의 외교’와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외교’
김호준 교수가 ‘미국의 외교’
손기섭 교수가 ‘일본의 외교’에 대해 각각 기술하고 있다.

* 성 강사의 기록 중 몇가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중세유럽은 국가가 없으면 외교도 존재할 수 없다는 원칙이 확립된 시기이다.
중세 말기인 13, 14세기 이탈리아 도시국가들 간의 외교적 행위가 근대외교의 출발로 간주된다.
근대외교의 본격적인 대두는 1648년 웨스트팔리아조약 이후 교황이나 모든 군주들이 평등의 기초위에서 독립주권의 국가를 형성하면서 시작됐다.
프랑스 루이 14세는 외교제도의 발전개선에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근,현대의 외교제도는 곧 프랑스 외교제도의 모델이 그 주축을 형성했다.
19세기가 유럽을 중심한 구외교의 시대였다면, 20세기는 미국을 중심한 신외교의 시대라 할 수 있다.
미국외교의 기원은 윌슨의 국제연맹창설과 그의 평화안으로부터 출발했다.
오늘날 외교는 정보통신의 발달로 정치 군사적인 분야로부터 에이즈, 유전자, 다국적 범죄, 의약품, 컴퓨터 소프터웨어 등 다양한 분야로 확대됐다.

* 권 교수의 기록 중 몇가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해롤드 니콜슨의 설명에서도 나와 있듯이 외교라는 말의 기원은 공문서와 관련이 있다.
프랑스어에서 나라사이의 교섭의 의미로 외교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나폴레옹전쟁’ 시기였다.
외교는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돼 17~18세기 프랑스에서 완성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해롤드 니콜슨이 대표적이다.
반면에 외교란 과거 5백년의 주권, 영토국가보다 앞서서 존재해 온 영속적인 국제제도로 보는 견해도 있다.
영속적인 국제제도라는 관점에서 유교문명권의 외교를 이해해보자.
‘예기’에 외교의 의미가 분명히 나와 있다.
고대 유교문명권의 외교는 ‘사교’였다고 할 수 있다.
‘사기’에서 외교는 가족외의 사람들과 사귀는 행위를 의미하기도 했다.
따라서 유교문명권의 외교라는 낱말은 오늘날 외교와는 매우 다른 의미였다.
유교문명권에서의 외교는 ‘예’에 어긋나는 행위로 비난의 대상이었다.
‘예기’에서는 외교나 전쟁까지도 ‘예’의 적용대상이었다.
‘예’의 중요성에 대해 송나라 학자 호안국이 명쾌하게 지적한다.
‘중국이 중국이 되는 까닭은 예의 때문이다. (예의를) 한번 잃으면 이적이 되고, 두번 잃으면 금수가 되어 인류는 멸망한다’
‘예’는 유교문명권에서 사회규범의 총칭이자 그 정수였다.
유교문명권에서 외교사상의 주류는 법가나 병가 등의 현실주의보다는 유가나 도가, 묵가 등의 이상주의가 강조됐다.
유가의 이상주의적 외교사상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은 ‘중용’의 9경장이라 하겠다.
유교문명권의 외교문제는 국제정치학뿐 아니라 역사학, 철학 등과 함께 한 학제연구가 절실하다.

* 고 교수의 ‘힌두문명권의 외교’에서 몇가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아르트 샤-스뜨라’는 현재 완벽하게 보존된 유일한 고대인도의 정치서적이다. 이 책을 중심으로 힌두문명권의 외교를 살펴보자.
아르트 샤-스뜨라는 제국의 건설을 꿈꾸는 왕, 즉 정복자를 위한 책이다.
하지만 아르트 샤-스뜨라는 무력만이 정복자의 전부가 아니라 오히려 외교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까우띨리-야가 이 이론을 완전히 꽃피운 것으로 생각된다.
까우띨리-야는 부국강병이 세계정복의 기초가 된다는 점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또 한 국가의 번영과 쇠퇴는 징세원이 되는 국민들의 생업을 육성하고 장려하는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그 중 농업을 가장 중요시했다.
전투에서 끄샤뜨리아 부대가 최고이며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바이샤와 수드라 부대가 강력하다고 주장했다.
전투장비와 함께 까우띨리-야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마술의식과 비밀의식이었다.
군사력 강화에 있어 까우띨리-야는 동맹국의 원조를 중요하게 보았다.
따라서 까우띨리-야는 왕의 자질이나 물질적 자원보다 외교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까우띨리-야는 5가지 원칙하에서 외교가 수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 왕은 자신의 국가를 발전시켜야 한다.
2. 적은 제거되어야만 한다.
3. 동맹국이 있어야 한다.
4. 정책 선택은 언제나 신중해야 한다.
5. 전쟁보다 평화가 선호되어야 한다.
6. 승리했을 때는 물론 패배했을 때도 왕은 정의롭게 행동해야 한다.
현재의 굴욕이 미래의 국력증가를 가져다 줄 수 있다면 왕은 그것을 감수해야만 한다.
첩보경쟁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까우띨리-야가 제시한 기만술들은 인간의 심리에 대해 거의 완벽한 분석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암살자의 사용은 관점의 차이에 따라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암살은 전쟁에 비해 경제적일 수 있고 보다 인간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전쟁은 암살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명과 비용을 소모시키기 때문이다.
아마 앞으로 오랜동안 까우띨리-야가 적시하고 주장했었던 외교적 관점들은 현실 외교관계에서 가장 쉽게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 황 교수의 ‘중세 유럽에서의 외교’와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외교’에서 몇가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중세유럽외교 및 국제관계에 대한 영향은 교회법, 관습법, 로마법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교회법’이다.
중세유럽은 교권과 속권이 함께 존재하였던 바, 실제로 외교사절의 기원은 교황에 의해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중세외교는 교황우위의 외교라 볼 수 있다.
김홍철 교수는 비잔틴의 외교적 관행이 서유럽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김홍철 교수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위해 해롤드 니콜슨의 말을 인용한다.
‘비잔틴 세계는 베니스에 외교를 가르쳐 준 스승이고 베네치아 사람들은 비잔틴의 외교양식을 이탈리아 도시국가간의 외교관계 운영에 도입, 활용했으며 이탈리아식 외교제도양식은 바로 프랑스와 스페인 및 온 유럽에 번져갔던 것이다.’
김홍철 교수는 ‘근대외교제도의 근원은 교황사절제도에서 출발한 중세 교회제도조직에 뿌리를 박고 있다고 역설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한다.
김홍철 교수는 중세의 외교사절을 임시대사, 특명전권대사, 주재대사(상주대사)로 분류하고 있다.
임시대사, 특명전권대사는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 주재대사는 장기간을 임지에 주재하기위해 있게 된다.
중세말기는 국왕외교가 성행했다는 특징이 있다.
현대적 의미의 외교는 13~14세기 이탈리아에서 발생했다.
하지만 데리앙은 근대적 의미의 외교는 유럽국가체제가 성립된 이후에 발생한 것으로 보고있다.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외교는 마치 혼혈아와도 같은 복합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탈리아 반도의 독특한 지정학적 상황은 상주사절에 기반을 둔 새로운 형태의 외교제도를 만들어 내는 동인으로 작동했다.
도시 참주정은 이탈리아의 정치적 조건을 규정짓는 핵심으로 작동했다.
마팅리는 이탈리아에서 외교적 혁신이 일어난 배경으로 상업적 발전에 주목한다.
누가 상석에 앉는가 등의 심각한 외교적 문제 등이 1815년 비엔나 회의 및 국제협약에서 해결되는데 이는 이탈리아 외교의 공헌이라 볼 수 있다.

* 김 교수의 ’21세기 미국의 외교’는 2007년 경까지 진행됐던 미국의 외교를 기술하고 있다.

지금은 통계수치가 약간 달라진 것도 있겠지만 김 교수가 인용한 초강대국 미국의 실체는 다음과 같다.
중국은 지금의 경제성장이 계속된다면 2030년 쯤에는 미국과 대등한 경쟁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군은 세계의 모든 해양을 컨트롤하고 유럽에서 아시아대륙 끝까지 관리하고 있다.
20층 건물 높이에 70대의 전투기가 탑재된 요새도시인 엔터프라이즈 선단 하나만으로 미국은 지구상의 대부분을 파괴할 수 있다.
이런 선단을 미국은 12개나 보유하고 있다.
미국은 135개 국가에 군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전세계 국가의 70%에 군을 주둔시키고 있다는 의미이다. 해외 군사시설은 700개에 육박하고 있다.
인터넷 사이트의 80%는 미국소유이며 인터넷 사용언어의 90%가 영어이다.
김 교수는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의 일방주의가 어떻게 부상하는지를 설명하면서 일방주의와 다자주의를 흐름을 비교하고 있다.
조셉 나이, 폴 케네디, 한스 모겐소 등 일방주의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협력과 정의, 국제여론의 존중 등을 강조한다.

* 손 교수의 ‘일본의 외교’에서 참고할만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일강화조약과 미일안보조약은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인돼 이듬해 1952년 4월 28일 발효됐다.
양 조약이 발효된 같은 날 일본은 대만 국민정부와 ‘일화평화조약’을 체결했다.
1972년 중일 국교회복에 이르기까지 중일관계는 미일관계와 일본 국내정치에 직접적으로 연동됐다.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발발한 걸프전은 미일동맹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걸프전에서 일본의 공헌은 90억달러의 전비부담과 40억달러의 부흥자금 제공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 이유는 일본이 자금협력을 솔선해서 하지 않았으며 미국의 강력한 요청 이후에 조금씩 했다는 점과 인적 공헌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1995년 2월 미국정부는 미국의 동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의 안전보장전략을 통해 미일안보관계의 틀을 재정립하는 일을 구체화시켰다.
즉, 금후 20년에 걸쳐 10만명 규모의 미군병력을 유지할 것을 명확히 하고 미일동맹의 역할을 아시아 태평양지역으로 확대시킬 것을 주장했다.
1996년 4월 클린턴 대통령과 하시모토 수상과의 정상회담에서 ‘미일안전보장 공동선언’이 합의했다.
이 선언에서 그동안 사용하길 꺼리던 ‘동맹'(Alliance)이란 단어를 명백히 사용했다.
1998년 11월 장쩌민 국가주석이 일본을 방문했다. 이때 정상회담을 통해 ‘중일공동선언’이 채택됐다.
일본정치시스템은 1993년 비자민연립정권의 등장과 1994년 중의원 선거제도를 소선거구 비례대표병립제로 전환하면서 ’55년체제’가 종결되고 21세기 들어 ‘2003년 체제’적 속성을 갖게 된다.
‘2003년 체제’에서 일본의 외교안보 정책노선이 중대한 전환을 이루었다.
중일관계가 악화된다면 그 기폭제는 동중국해 천연가스 개발문제에서 비롯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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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현재 처한 상황에서 헤쳐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외교적인 지평을 늘려 나가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은 극심한 내분과 국론분열의 양상을 보이면서 외교정책은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북한과의 경제관계도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제상황과 국내상황의 균형잡힌 인식을 국민들이 먼저 갖고 있어야 합니다.
정치가들이나 언론만 쳐다보고 있으면 미리 짜놓은 체스판으로 쓸려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Stone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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